16.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I believe in the life everlasting). | 이미순 | 2023-04-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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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이 중요하다 16.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I believe in the life everlasting).
사도신경의 마지막 ‘신앙고백’에서 ‘영원한 삶에 대한 신앙이 고백된 것’은 ‘기독교의 신앙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생명을 경시하는 철학적 종교적 전승이들 있었습니다. 고대 이상주의학파들과 금욕적인 종교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이 세상에만 있지 않고 우리가 나그네처럼 이 땅을 여행하고 있기에 지상의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생명’으로 번역할 수 있는 헬라어가 3가지 나옵니다. 프쉬케(ψυχή), 비오스(βίος), 조에(ζωή)입니다. 이 셋은 넓게 말해서 ‘생명’으로 번역하지만, 각각의 독특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프쉬케(ψυχή)’는 생물학적 목숨입니다. 의학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육체적 목숨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6:25)라는 말씀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한복음10:11),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요한복음10:15)라고 말씀하셨을 때, "목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쉬케’입니다.
‘비오스(βίος)’는 영어 바이오(bio)의 기원이 된 헬라어입니다. 그러나 영어에서 바이오가 ’생물‘ ’생명‘ ’생리‘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달리 헬라어 ’비오스(βίος)‘는 ’생명‘이라기보다는 ’생활‘이나 ’살림‘에 가깝습니다. 지상적 제한된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삶을 표현하는 비오스입니다. 요한1서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유혹으로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한1서2:16)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새번역성서는 ’세상 살림‘으로 번역하여 이해를 돕습니다. 헬라어로는 ’비오스‘입니다. 살림살이 혹은 생활수준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탕자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나누어 준 것도 비오스입니다(눅15:12). ’살림‘을 미리 나누어 준 것입니다. 빵 사먹을 두렙돈을 다 바친 과부를 가리켜 ‘이 과부는 생계를 다 바쳤다’고 칭찬할 때 ‘생계’가 바로 ‘비오스’입니다.
조에(ζωή)는 프쉬케나 비오스와는 다른 생명입니다. 프쉬케와 비오스는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목숨이나 생활의 수준과 방식은 상당 부분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조에(ζωή)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숨겨두신 생명입니다. 조에는 보다 완전한, 보다 근원적인, 보다 영원한 생명의 호흡과 연결되어 있는 생명입니다. 씨앗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씨앗을 피우고 열매 맺어 풍성하게 사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 예수께서는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요6:35), 생명을 살리는 빵,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빵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조에(ζωή), 생명은 예수를 만날 때 살아나 역동합니다. 이 생명이 있으면 ‘비오스’가 어려운 형편이라 할지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조에’의 힘입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전하는 바입니다. 고린도후서4장 7절의 ‘보배’를 ‘생명’(ζωή)으로 바꾸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0)”
‘요한복음이 전하는 신앙의 본질’은 ‘비오스’에 있지 않고 ‘조에’에 있습니다. 조에를 살리고 풍성케 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영원한 삶은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생명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우리에게 영생을 선사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바로 지상적인 삶의 관계에 속하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는 “나는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는 사도신경의 첫 고백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영원한 생명이 열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영원한 삶의 공동체의 방향을 지시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일서3:14)”고 했습니다. 영생(영원한 생명)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이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일려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3: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11:25-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5:24)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으면 영생한다는 진리를 확실하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21:3-4)
인간의 생명은 과연 죽음으로 그만인가? 인간의 존재와 인격은 죽음과 함께 없어지고 마는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많은 철학과 종교들은 죽음을 넘어서서 인간이 소유한 영적인 생명과 영혼불멸과 선하고 영원한 것의 반복됨을 말함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 안에 내재하는 영원 생명에 의한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힘과 엄습해 오는 사망의 위력 앞에, 서있는 연약한 인간임을 말했으며, 생명의 하나님께 생명의 보호를 호소했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피난처이시며 도움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입니다. 죽음은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전적으로 희망의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곳이요 우리 인간이 육을 떠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최종적인 장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원어성서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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