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리교 신앙의 핵심
- 정진권 2022.5.22 조회 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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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의 신앙의 핵심
마7:15-20
1. 웨슬리는 이 땅에 감리교회가 소멸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감리교의 정신이 소멸된 감리교회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한국감리교회는 18C 영국을 구원한 웨슬리의 신앙의 전통에 선 감리교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웨슬리가 언급한 감리교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감리교 신앙은 한 영혼을 사랑하는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사랑입니다. 웨슬리는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영국 성공회로 부터 설교할 강단을 빼앗겼지만 웨슬리는 포기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산과 들과 대장간과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때로는 공동묘지에서도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웨슬리는 88세의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50년 동안 25만 마일(40만Km)을 말을 타고 다니며 전도하였습니다. 웨슬리가 말을 타고 다니며 여행한 거리가 지구를 10바퀴나 도는 거리라고 합니다. 웨슬리가 염려한 감리교회의 정신을 잃어버린 감리교회란 영혼구원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조직과 교리만 남은 감리교회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둘째, 감리교 신앙은 성결한 삶을 중시하는 성화론적 구원관입니다. 웨슬리의 구원론의 핵심은 성화입니다. 회개가 구원의 현관(porch)이라면, 칭의는 구원의 문이요(door), 성화는 구원의 과정(process)이며, 구원의 완성은 완전성화의 단계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루터의 칭의론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한 번의 칭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성령의 기름부음과 성결한 생활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언제까지 입니까? 죽음이 우리의 영과 육을 갈라놓을 때까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사도바울이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고 함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빌3:12).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름의 상입니다.(빌3:14). 부름의 상이 무엇입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영생, 천국입니다.(빌3:11).
웨슬리의 성화론은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죄악으로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세속주의를 타파하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칭의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이 끝난 것이 아니라 외적인 행위 죄(=자범죄)뿐만이 아니라 내적인 죄(본성적인 죄, 원죄)을 이기고, 죄 없음(sinlessness)의 상태에 이를 때 까지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완전의 단계는 부지중에 짓는 죄를 제외하고서는 일체의 죄에서 떠난 단계입니다.
3. 셋째, 감리교 신앙은 개인구원의 토대 위에 사회 개혁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개인성화에서 사회적 성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건한 생활의 토대 위에서 사회성화운동을 전개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감리교도들은 당시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의 구조적 악을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 당시 노동여건은 살인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산업 노동자들의 1/3이 5세-8세의 연령에 있는 어린이들이었고, 12시간 이상 일을 하고, 여성 노동자들이 상반신 나체로 네발가진 짐승처럼 석탄 바스켓을 운반하는 노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감리교 설교자들은 직접 탄광에 들어가 노동속회(working class)를 조직하여 매주1회씩 예배와 기도 모임을 갖고, 노동조합을 구성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였습니다. 빈민들을 위한 금고를 만들고, 속회에서는 매주1페니씩 헌금하여 노조를 지원하였고, 그 가족을 도왔습니다.
이와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영국이 프랑스 혁명이나 볼세비키 혁명과 같은 피의 혁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감리교회의 사회운동의 결과라고 평가하였고, 이것을 감리교 혁명(Methodist Revolu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웨슬리는 노예해방 운동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노예제도는 노예와 노예주인 모두를 늑대처럼 만들고 비인간화하는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노예주들은 동료 피조물인 인간의 귀를 구어 먹고 병든 노예들을 똥처럼 대서양에 던져 버린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노예제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사랑에 토대를 둔 기독교와는 전혀 화해할 수 없는 비도덕적인 제도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노예제도의 폐지는 당시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과 반대되는 정치적 발언이었으며, 미국의 남북전쟁의 기폭제가 되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4. 감리교회의 사회성화 운동은 경제윤리를 중요하게 생각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에 보낼 때 땅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로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산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웨슬리는 재산상속을 반대하였습니다.
물질을 육체의 안락이나 안목의 정욕 및 이생의 자랑을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유대인들은 자기 소유의 1/10을 나누어 주고, 바리새인들은 소유의 2/10를 이웃을 위하여 나누어 주지만 참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분배의 정의를 강조하였습니다.
자본주의 정신의 기본이 된 웨슬리의 경제원칙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gain all you can)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저축하라.(save all you can) 할 수 있는 대로 모두 주라는 것입니다(give all you can)” 막스 웨버(Max Weber)는 루터(Luther)의 천직 사상, 칼빈(Calvin)의 금욕주의와 더불어 웨슬리의 이 경제원칙이 자본주의 정신의 토대가 된 기독교 윤리(Protestant Ethic)라고 주장하였습니다.
5.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이 강조한 열매신앙에 관한 말씀입니다.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7:18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기독교의 삼대 종파인 루터교와 칼뱅의 장로교, 웨슬리의 감리교의 신앙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루터는 칭의론 중심의 신학입니다. 좋은 나무가 되는 것에 집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신앙에 집중하였다면, 웨슬리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난 다음에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는 성화의 신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좋은 나무가 되었더라도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거름을 주고 전지를 하고, 소독을 하고 나무를 잘 가꾸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6. 칼뱅은 예정론 중심의 신학입니다. 농부가 과수원에 나무를 심을 때 벌써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무를 예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접을 붙여서 좋은 나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전지를 잘 하고 거름을 주고 나무를 잘 가꾸어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나무와 열매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정론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만인구원(萬人救援)을 주장하였습니다.
구원의 은총은 칼뱅처럼 구원받을 사람과 저주 받을 사람이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이중예언), 누구에게나 다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잡느냐, 거부하느냐 라는 것은 자기 믿음, 자기 의지에 다려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free grace)를 중시하였습니다.
칼뱅은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잡을 수 있는 이성과 선택의지가 없다고 보았고, 웨슬리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되었지만 아직 선택할 의지와 양심과 이성은 남아 있다고 보았습니다. 장로교 신학자들이 감리교의 자유의지론을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라고 비판합니다. 알미니안 주의와 웨슬리의 자유의지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알미니아주의 신앙을 지지합니다. 사랑이 근본이지고, 정의가 근본이신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를 예정해 놓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누구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감리교회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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